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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2019.08.31 20:54

레벨 1 글쓰는 NPC ( Lv. 1 / 포인트 : 59점 ) [ 추천 / 반대 ] (1.152.111.♡)
호주에 왔다.
이 한 문장이 지난 25년의 세월 동안 내가 해온 그 모든 것들보다 가장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나는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그 날 밤 눈을 감는 순간이 오기를 바라는 타입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로맨티스트들은 사랑이없으면 죽고 싶고, 여러 전과가 있는 변태들은 화학적 거세를 당하면 죽고 싶고, 딸 없이 아들만 서너명씩 있는 어머님들은 아무리 혼내도 학습 효과가 전무한 아이들의, 하루가 멀다하고 집안을 깨부시고 다니는 말썽에 죽고 싶어하실지도 모른다. 혹은 죽이고 싶어하거나. 물론 이 모든 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수준이다. 나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매일 뭔가를 해야하는 순간이올 때마다 그냥 꼴까닥 죽고 싶어하는, 그런 상남자다.
예전에 핸드폰을 바꾼 적이 있었는데, 통신사에서 일을 잘못 처리해주는 바람에 내 명의로 된 핸드폰이 두 개로 등록되었고, 핸드폰 요금이 두 배로 빠져나가는 걸 금방 발견했었다. 요즘은 이런 사소한 문제쯤은 통신사에 전화를 걸어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대리점에 굳이 방문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매달 초에 꼬박꼬박 날라오는 핸드폰 요금 통지서를 보면서도 전화상으로 이것저것 설명해야 할 내 자신을 상상하는 것이 너무 두려워 1년을 넘게 헛돈을 내고 자빠져있었다.
물론 이런 나라도 당장 눈 앞에 닥친 문제가 손과 발을 움직여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그리 미루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배가 고프니 냉장고에 고이 보관된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는 정도라면 나도 기꺼이 귀한 몸을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요리를 한다? 웃기는 소리다.
라면도 물 끓이고, 스프 넣고 면 넣고 시간 맞춰 불을 끄는 것이 귀찮아 부숴 먹은 적이 훨씬 더 많다.
그러니 나는 부모님이 며칠간 여행을 가신다면 생라면으로삼시세끼를 해결하는 아주 상남자 같은 식습관으로 돌변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우리 가정에 큰 문제가 닥쳤다. 사실 문제라기보다는 변화라고 해야할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국제무역과 관련된 국내의 큰 기업에 다니시는데, 이번에 말레이시아 굴지의 기업과 큰 비지니스 협약을 체결하는데 성공을 하셨다. 그런데 그 담당자로 발령이 나셔서 최소 1년 동안 말레이시아에 가셔서 일을 하셔야 한다는 것이다.
두 분은 이번 기획이 두 분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고, 상당히큰 득을 볼 수 있는 일이라고 기뻐하시지만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부모님을 따라갈 순 있다. 근데 말레이시아는 영어권 국가도 아닐 뿐더러 한국어를 쓰는 국가는 더더욱 아니다. 말레이시아의 수도인 쿠알라룸푸르르면 영어만 할 줄 알아도 생활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우리 가족이 가야할 곳은 시내라고 할 수 없는 시골이었다. 안 그래도 교통이 좋지 않은 국가에 시골이라고 하니 웬만한 곳들은 죄다 걸어가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야한다고 한다.
나의 성향과 말레이시아라는 환경을 심히 고려해보니, 나는 1년 내내, 혹은 그보다 긴 시간 속을 내 방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 혼자 남을 것을 택했다.
근데 언어가 통하고 교통이 좋다고 해봤자 부모님이 없는 한국에서의 나는 생라면을 향해 매 끼니마다 쌍욕을 하며 깨부숴먹는 미래만이 보일 뿐이었다.
친구가 없는 왕따는 아니지만, 아무리 친한 친구더라도 나의 건강을 걱정하여 집사마냥 우리 집에 찾아와 내게 영양이 규칙적으로 들어간 음식을 요리해주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수명과 행복의 빈부격차가 불가피하게 벌어지겠지.

"워킹 홀리데이나 와라"

중학생 때부터 친구였던 현우는 군대를 다녀오자마자 "워킹 홀리데이(Working holiday)"라는 이름의 비자로 호주로 떠났다. 그게 벌써 1년도 넘었다.
오래간만에 국제전화를 하여 나의 상황을 설명하자 현우는그러한 제안을 던진 것이다.
그는 호주의 멜버른이라는 대도시에서 하루에 5시간 정도를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여기저기 놀러다니는 데 쓰고 있다고 했다.
그는 호주라는 나라의 최저 시급이 얼마큼 높고, 그에 반해 일의 강도는 얼마나 낮고, 인프라가 얼마나 좋고, 살기 좋은 나라인지 한 시간을 침 튀겨가며(물론 전화상이라 침을 맞지는 않았다.) 내게 설명했다.
그래 이거다.
부모님은 나의 게으름을 걱정하신다는 명분으로 매달 용돈을 생활비에 턱없이 모자란 만큼만 보내오신다고 선언하신바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스스로 생활비를 벌기 위해선 하루에 8시간은 일해야 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하루에 짤막하게 3시간 정도만 일을 시키는 일이 거의 없었다. 다들 석식제공을 해주고 싶어 안달난 곳들 투성이었다. 있다고 하면 바쁜 시간대에만 사람을 불러 일을 시키는 식당 일을 해야 하는데, 딱 바빠 죽겠는 시간에만 출근을 하여 몸을 혹시하느니 삼시 세끼를 생라면만 먹더라도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으로 남은 여생을 보낼 것이다.

하지만 호주 워킹 홀리데이라는 비자를 신청하는 것이, 한 시간은 컴퓨터 앞에 앉아 이것저것 작성을 하고 큰 병원으로 신체검사를 받으러 가야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세상의 모든 고충을 짊어진 얼굴로 하얀 천장을 꽤 오랫동안 올려다보았다.
아니, 그냥 비행기 표만 사면 되는 거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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